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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이야기


화장실은 가장 빠르게 나의 과거와 이별하는 공간이다. 공적인 장소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화장실에서는 화장실에서 하는 본래의 일 외에, 울거나 밀린 메시지를 보내거나 손톱을 깎거나 뜻밖의 험담을 듣게 되기도 한다. 적과 마주치기 전 가슴을 쓸어 내리고 걸음을 숨기거나 전쟁터로 복귀하기 전 숨을 고르며 비를 피하는 처마같은 곳. 그럴 때 내쉬는 숨 저편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벽의 물건들, 바닥의 타일 같은 것들이 내내 신경쓰였고 그것들이 서로 그물처럼 얽혀있는 어떤 구조가 있다고 느꼈다. 그 패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융합대학원에 들어갔다. ’슬기와 민‘ 이라는 그래픽디자이너 듀오 중 한명이자 출판사 스펙터(specter, 유령)프레스 대표인 최성민 교수님 수업을 들었다. 2010년 2학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시각디자인과에 개설된 <브랜드 매니지먼트>라는 수업이었다. 주제를 정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경영 개념을 포함한 브랜딩까지 하는 것이 그 학기의 과제였다. 


나는 ’화장실‘을 주제로 했다. 당시 서울 사대문안에 있는 주요 빌딩들의 화장실을 조사했다. 어떤 화장지를 쓰고 어떤 손세정제를 비치하였는지, 흘러나오는 음악은 무엇인지, 청소는 몇 시간에 한 번 이뤄지는지 조사했고 기저귀교환대나 핸드드라이어의 브랜드까지 뒤집어 살펴보았다. 그 빌딩을 소유한, 혹은 그 빌딩에 입점한 기업과 그 빌딩의 화장실에 비치된 용품을 만드는 기업과의 관계도 헤아려 보았다. 화장실을 어떻게 꾸려놓느냐에 따라 그 기업의 고객에 대한 태도나 철학도 미세하게나마 짚였기 때문에 조사가 즐거웠다. 


화장실은 인간이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고 자신을 단장하는 곳이다. 어떤 공간을 찾은 손님들이 자사의 화장실에 어떻게 머물다 떠나게 하는지의 고객경험은 인간의 생체에 기억을 남기므로 브랜딩의 일부로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그 학기의 최종 과제물로 『소설 화장실』과 『소설 브랜드 매니지먼트』라는 책을 만들어서 냈다. ’스펙터프레스‘를 본뜬 ’토일렛프레스‘라는 가상의 출판사 이름도 넣어서. 그리고 6년 뒤 토일렛프레스는 실재하는 출판사가 되었다. 


나는 융합대학원의 첫 입학생이었다. ‘융합이 무엇인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여기저기 온몸으로 부딪히고 있을 때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졸전을 앞둔 미대 4학년 2학기 개설수업을 굳이 1)타 전공 2)대학원생이 수강하는 건 교수자의 입장에서 결코 달가울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최성민 교수님은 표정만 무심할 뿐 실은 굉장히 꼼꼼하게 크리틱을 해주셨다. 무수한 좌충우돌을 딱하게 바라보거나 비스듬하게 보지 않고 그냥 바라봐 주시는 게 힘이 많이 됐다. 그 힘으로 계속 조사를 했다. 수업 동기들도 내가 흥미를 느낀 포인트들을 눈높이를 맞추어 들어주려고 했고 알게 모르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도 해 주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꽤나 변덕스러운 성미이지만 관찰하는 일과 발견하는 일이 적성에 맞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 ‘이것에 질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있었다. 의외로 큰 환멸없이 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일을 할 때 성심으로 도와주는 분들이 나타난다. 태어나는 모든 책의 모서리들은 그분들이 메워주고 계신 것이다. 


(내가) 발견한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게) 발견되게 만든다. 


‘출판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냐’는 질문만큼이나 ‘출판사 이름이 왜 토일렛프레스냐’는 질문도 곧잘 받는다. 영미권에서는 변기를 TOILET이라고 부르니까 청결하지 않은 이미지라고 사명을 변경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도 있었다. 짓궂은 접근에는 에둘러 설명하거나 어물쩡 웃으며 넘기기도 했다. 결국 있었던 일에 대한 적확한 설명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입밖으로 쉽게 내어놓지 않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을 만나 궁금한 점을 물을 때 다짜고짜 질문이 먼저 찾아가는 법은 없다. 대상에 대한 흥미는 발견에서 시작되어 밥먹는 자리에서 발전한다. 밥이 아니라 비록 차를 마시는 자리라 할지라도 이것이 결국 화장실에 대한 이야기인만큼 되도록 신속히 말하되 깎이거나 빠진 부분이 없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토일렛프레스의 유래를 꺼내놓고 싶었다.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잠언 24:26)

질문에 알맞은 즉답을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화장실에 관해서라면 평소 줄곧 생각해오던 것이기에 신이 나서 얘기가 장황해질 가능성도 있다. 


아직도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설명하려다 보면

“(화장실은) 꼭 필요한 거 잖아요”

“(화장실은) 하루라도 안 갈 수 없잖아요”

정도로만 해야 한다.


결국 나는 1)한마디가 아닐 설명을, 

2)그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3)제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전임교수가 되었을 때의 장점으로 개인연구실을 갖는 것을 꼽는 사람들이 있다. 일상 공간과 분리된 작업실을 집 밖에 일부러 마련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리로 된 방이라 하더라도 타인과 분리된 업무공간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고도의 집중을 위해서든, 온전한 휴식을 위해서든 인간에게는 일정량 혼자 있을 수 있는 곳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누구나 세계 어디를 가도 화장실에 가는 시간만큼은 최소선으로 확보할 수 있다. 이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고 이것을 시작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시간을 점차 늘려갈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내게 이런 것들이 필요했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시간을 마련하고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발견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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